내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데 까지 30년이 걸렸다. 나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봐도 볼수록 노답이라는 데에 좌절했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 할수록 어쩐지 털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상대에게 열심을 낼수록 고통을 떠안고, 떠안겨주게 되는 그 상황을 애써 무던하게 만들어보려고 무관심한 태도로도 살아봤지만 어딘가 무기력해지고 막막한 정체기에 봉착하게 됐다. 사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은 나의 열심과 수고와는 어쩌면 무관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몇 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연애사를 마무리 지으면서는 세상에 KO당한 것 같은 커다란 패배감마저 들었다.
뒤돌아보니 가장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격렬히 미워한 대상은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사랑은 원래 그렇게 좋아하며 동시에 엄청 미워하면서도 중독처럼 끊지 못하는 애증의 양가적인 감정인가- 하며 서로를 닮은 죄인들과 마주 앉아 돌고 도는 이야기만 했던 수많은 어린 밤들이 있었다. 모두 다 온전히 사랑하지 못해서,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힘든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보이게, 보이지 않게 쌓여가던 마음속의 테트리스 블록들이 곧 천장까지 닿을 듯이 쌓이는 속도가 빨라지며 쫄려오던 때에 “타임!”을 외치고 그 분을 불렀다. 늘 긴급 상황에서만 찾던 그 이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램프의 지니처럼 찾던 그 이름. 겉으로는 ‘주(인 되신)님’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매번 똥 싸놓고 치워달라는 식으로 하인처럼 부르던 그 이름. 나의 신앙은 예수님이 진짜 누군지를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런던에 오자마자 가장 많이 반복해서 들었던 이영주 목사님 설교 말씀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격 없는 우리들에게 그의 하나뿐인 아들까지 못 박혀 죽게 하셨는지’였다. 그 말씀이 나의 가슴을 때렸다. 평소에 뭔가를 반복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내가 그 말씀을 듣고 또 듣는데 하나도 지겹지가 않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눈물이 많이 났다. 십자가 아래에서 나의 고통따윈 비할 바가 안 되고, 그 사랑이 나를 포함 이 세상 모든 불완전한 것들을 덮어버리고도 남을 것처럼 한없이 크게만 느껴졌다.
그런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싶어졌고, 예수님을 알고 싶어서 모든 말씀이 있는 곳은 다 찾았다. 주일예배, 셀모임을 시작으로 수요예배, 새벽 묵상까지 그야말로 말씀을 따라, 말씀에 붙잡혀서, 말씀대로 역사된 시간이었다. 끊임없이 넘어지고 일어서고 마음껏 “성령의 ride”를 타며 달려온 한 해였다. 그 분의 진정한 이름을 찾고 깊이 교제를 시작하면서 십자가 막대가 내려와서 꽉 막혔던 것들이 펑!하고 사라졌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다(애 3:33). 오직 평안과 기쁨만을 주길 원하시는 분이다. 사랑 그 자체다(요일 4:16). 그 오리지널 사랑을 구해야, 그 사랑에 붙잡혀서 그 안에 거해야 절로 사랑 할 수 있음을 이제 알게 되었다(요 15:4). 사랑은 결코 천국 같기도 하고 동시에 지옥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랑 아니면 지옥이다.
우리를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아끼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허락하신 유익한 고통이 있다면 오직 그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삶 속에서 전하는 가운데 받는 고통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