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19-22) 여기서 ‘좋은 것’과 ‘악’은 일반적인 선과 악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문맥으로 보면 예언과 관련 있다. 그러니까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그중에 좋은 것은 취하고 악한 것은 버리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것도 영어로는 성령의 불을 꺼지 말라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성령의 불을 끌 수도 있고, 사람들이 예언이라고 말하는 것 중에 악한 것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 성령사역과 관련해서는 분별이 필요하단 뜻이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과 예언과 관련된 긴 지침을 주셨다.
그런데 이 같은 성령의 역사를 이해못하고, 주변에 여러 잘못된 사례들을 얘기하면서, 악령의 역사가 이렇게 심하니 성령사역 특히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는 주의 내지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그렇게 애매하게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분별을 요구하신 것인가?
그것은 성령의 인격성 때문이다. 인격적으로 사람을 대한다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일이다. 설득해서 이해시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하고, 일이 잘못 진행되어도 신중하게 고려해서 처리해야 한다. 반면 군대식은 그냥 명령하고 그대로 따라오게 만들면 된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면 시원시원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고민할 것도, 분별할 것도 없이 그 지시를 따르면 편할 것이다.
그런데 성령은 아니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물론 성경에는 그런 기적같은 내용이 많다. 그러나 그건 오랜 기간 선별해서 기록한 것들이고, 잠언과 전도서처럼 지혜자가 연구해서 깨달은 것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도 얼마든지 확연하게 그 신성을 드러내어 일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우리가 금방 로봇처럼 그분께 맹종하듯이 반응할 수 있는데, 그건 전혀 자녀다운 태도가 아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헷갈릴 수도 그래서 분별이 요구되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이다.
이 같은 성령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에게 성숙한 태도를 요구한다. 정말 성경을 잘 해석하고 깊은 묵상에서 나오는 이해력을 갖고, 거기다 실제 삶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더 확실해진 깨달음으로 그분과 동행하는 법을 배워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이 걱정한 대로 성령의 불을 끄고, 예언을 멸시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이 같은 태도가 얼마나 교회를 무기력하고 건조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무기는 위험하니 아예 쥐어주지도 않고, 무기 설명서만 들고 전쟁터에 내모는 무책임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어른이 되면 인생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도리어 삶을 더 아름다고 풍성하게 바라보게 하는 것을 배워간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정크푸드처럼 단순화시키려고 하면 안 된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은 새언약의 백성된 자의 최대의 복이다(롬 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