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먹어도 방금 요리한 것이 아무래도 맛있기 마련이다. 설교도 하나의 요리와 같다. 1991년에 목회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성경 내 한 권을 선택해서 처음부터 마지막 장까지 차례대로 설교하는 식으로 해 왔다. 강해설교라는 말도 듣지 못했던 시절 내 성격과 맞아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좋았다. 성경전체를 이렇게 다 설교해 보리라는 욕심에 사역지를 옮겨도 예전에 설교한 본문은 피하려고 했다. 나름 고집이 있어서 한 번은 다른 교회에 교역자로 초빙받기 위해서 그 교회 가서 설교로 선을 보이는 예배에서 설교본문을 그 전주에 이전 교회에서 설교한 본문 바로 다음을 가지고 설교할 정도였다.
그 소박한 꿈대로 성경전체를 설교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설교원고들이 컴퓨터에 다 들어가 있지만 똑같은 본문이어도 예전 설교원고를 보면 왠지 마음에 와 닿지가 않는다. 듣는 성도가 다르고 나도 생각이 아무래도 그 때에 비해서 성숙해져서 그런지 모르겠다. 내 스스로가 본문에 감동이 되지 않으면 설교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그래서 예전 설교원고를 보는 일은 거의 없다. 사실 다 지워도 상관이 없을 정도다. 늘 고백하듯이 설교는 ‘지금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경공부나 세미나 강의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내가 설교하면서 가장 유익을 많이 얻는 사람은 내 자신이다. 내 마음을 움직일 때까지 연구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그 본문에 깊이 잠길 수밖에 없다. 같은 본문이나 주제라도 이전보다 생각이 깊어가고 날카로워지고 무거워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새롭다’는 말이다. ‘새 노래’라고 했을 때 전혀 듣지 못한 노래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불렀던 노래지만 그 무게감이 달라서 완전히 다른 노래와 같다는 뜻이다.
지나간 부활절 수련회에서 ‘십자가’라는 주제로 전한 말씀이 내게는 그랬다.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십자가만큼 많이 설교한 것이 있을까? 그런데 이번에 이 주제를 놓고 설교하면서 바울의 십자가에 대한 고백이 이해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고, 그것만을 자랑하고 싶다.’ 정말 이것만 아는 것으로 충분하고 이것만 자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오랜 계획이었다.’ ‘십자가는 내 과거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십자가는 내 현재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십자가는 내 미래를 소망하게 만들었다.’ ‘십자가는 내 삶의 전부이다.’ ‘십자가는 내 삶의 스타일이다.’ 지금도 이 말씀들이 내 안에 꿈틀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