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장 1절-10절까지 세리장 삭개오를 만나주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묵상했다.
extreme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먼저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돌무화과나무에까지 올라간 행동에서, 두 번째는 그 바쁜 일정과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상황에서 죄인이라고 수군거리는 인물인 삭개오의 집에 하루를 머물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태도에서, 세 번째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 나머지도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으면 네 배로 되갚아주겠다는 삭개오의 결심에서.
또 하나는 ‘본다’는 단어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3),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4),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5),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7),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8)
다양한 시선들이 나온다. 주님을 향한 나의 시선은 어떤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해 있었지만, 그중 가장 간절하게 바라본 사람은 삭개오였다. 그런 그를 예수님 또한 클로즈해서 바라보셨다. 그러나 무리들은 삭개오의 그 간절함보다 외모만 보고 수군거렸다.
또 하나로 중요한 단어는 ‘오늘’이라는 단어이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10) 변화는 하루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과 헌신은 내일로 미룰 수 없고, 그분을 향한 돌진은 extreme 해야 한다. 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삭개오의 변화를 보라. 평생 돈만 바라보며 자기 백성으로부터 비난을 들어가며 모았던 그 돈이 아무렇지 않게 내어놓을 정도로 완전한 만족을 준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룻밤만 교제해도 이런 extreme 한 변화가 온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나의 태도가 extreme 해야겠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보여주신 그 사랑-십자가에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는 그 사랑이 가장 extreme 했다. 그래서 그 사랑에 사로잡힌 자들은 그 삶 역시 extreme 하게 바뀌게 되어 있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