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월요일 둘째 딸 여진이가 런던 온지 6년 만에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한국을 갔다. 처음 몇 년간 런던생활을 무척 힘들어 했다. 교회에 중학생을 둔 성도가 없다보니 어떻게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집에서 가까우면 좋은 학교인줄 알고 보냈는데 알고 보니 행실이 좋지 못한 학생들이 주로 가는 아주 수준 낮은 학교였다.
더구나 영어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반에 들어가서 중간에 진급도 쉽지 않아 2년간 곱셈 나눗셈을 배우면서 보내야 했다. 나중에 그것을 따라 잡느라 두 딸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나중에 어느 정도 극복하고 나서 한 고백이지만, 당시 총이 있었더라면 친구들을 쏴버렸을지 모른다는 그 말이 충격이었다. 살던 주택가도 가정들이 많지 않아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서만 있어야 했다.
그렇게 힘들어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지금 있는 집으로 이사할 여건을 마련해 주셨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학교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wimbledon에 있는 학교로 옮겼지만 이미 너무 자신감을 잃은 상태여서 1년 동안 친구 하나 없이 외톨이로 지내서 차라리 이전 학교가 나을 것 같아 다시 옮겨야 했다. 감사하게도 선생님들이 여진이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반도 제일 좋은 반으로 올려줬다. 그 때부터 자신감을 얻어서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다. 공부가 재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밖에 할 게 없었단다. 교회도 자기 또래가 없어서 목사 딸이 아니었으면 다른 교회로 옮겼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어할 때 여진이를 견디게 해 준 건 한국이었다. 한국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한국 가면 제일 하고 싶은 일들’, ‘한국 가면 꼭 먹고 싶은 음식들’ 수십 가지를 노트에 적기도 했고, 그 때 쓰려고 얼마 되지도 않는 용돈도 쓰지 않았고, 중간에 우리가 나무라지 않았으면 지금도 tube 대신 공짜 버스를 타면서까지 교통비를 모았을 것이다. 또 여기서 한국 애들을 만나도 그들은 다 영어를 써도 여진이는 혼자 꿋꿋하게 좋아하는 한국말을 했다.
이번에 GCSE시험을 최선을 다해 쳐서 더 좋은 학교로 옮길 준비를 다 해 놓고서 그 학교 개학 하루 전 날까지 한국에 있다가 오겠다고 하면서 갔다.
그렇게 가고 싶어 한 한국이지만 너무 일찍 갔더라면 영영 런던으로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한 이때 즈음 한국에 가는 것이 여진이에게는 잘된 것 같다. 나는 여진이가 한국에 있는 동안 여기서 받았던 모든 상처를 다 치유하고 돌아오기를 매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