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유명하다. 자아 성찰을 넘어,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고 끊임없이 탐구해서 진리에 다가가라는 뜻이다. 과연 그는 자신을 얼마나 알았을까 궁금해진다. 왜냐하면, 지어진 존재는 지으신 창조주를 만나지 않으면 자신을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내가 누구인지가 분명해진다. 성경적 인간 이해는 역설적이다. 가장 큰 부정과 긍정이 공존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대신 죽어야 할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흔히 생각하듯이, 그리고 고상한 세상 종교들이 사람은 열심히 노력하면 선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건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신다. 만일 우리 힘으로 만족할만한 선을 이룰 수 있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희생 이유가 하등 없다. 우리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데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그렇게 끔찍하게 죽게 했다? 그건 정상이 아니다. 그것밖에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내 주변 사람에 의해서 큰 상처를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만큼 문제가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죄책감을 갖는 것도 자신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런 행동을 했다고 괴로워하는 것이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어떻게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이해할 수 없다며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연약한 존재, 스스로 의롭게 살아갈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하나님, 저 그런 사람 맞습니다. 저는 구원자가 필요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회복도 구원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교만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성경만큼 우리 인간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 것도 없다. 개나 소처럼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데도 우리를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영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하나님 나라 상속자로 삼으셨다(롬 8:17). 그러니까 당신이 인간이 되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겠다고 대신 죽어주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하나님의 죽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과 함께,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인식, 이 둘이 다 가능하다. 오랜 기간 예수를 믿어오면서 나 자신의 연약과 부족과 죄를 마주하면서 많이 괴로워했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네. 주님. 맞습니다. 제가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그러는 동시에 “주님이 약속하신 것이니까 제가 이번에 그 일을 할 때 역사해 주세요”라고 담대히 구하고 시작하면 놀라운 해프닝들이 생겨난다. 마치 하나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지나간 유초등부 여름성경학교와 중고등부 수련회를 지켜보면서 이 경험을 다시 했다. 재미있게 그리고 무사히 끝나는 행사가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되기를 구했고 그렇게 기대했더니 이전과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자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다. 그래서 믿음은 기대하는 것이다. 더욱 나답게 살기 위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