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는 도덕적인 뉘우침, 그 죄를 버리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 물론 그것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회개의 주요한 내용은 아니다. 그럴 것 같으면 자기 안의 욕심까지 버리려고 애쓰는 불교야말로 회개를 강조하는 종교가 될 것이다. 세상 모든 종교와 심지어 도덕주의자들마저 회개를 강조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하나님이라는 인격,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향해 돌이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우상과 죄악을 버리는 것이 따라 오는 것이다. 심지어 죄를 버리는 것도 우리의 의지와 결심과 노력으로 이뤄진다기보다 우리가 돌이켜서 안기게 된 하나님의 품에서 완성된다고 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이 회개하는 것을 무척 기뻐하신다는 것을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과 드라크마 비유에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탕자 비유에서 그 회개가 무엇인지를 감동스런 이야기로 설명하셨다. 그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누가는 그가 쓴 두 권의 책에서 이 회개를 유독 많이 강조한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눅 5:32)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눅 24:47)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6)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오늘 사도행전 11장을 묵상했다. 고넬료 집을 방문해서 복음을 전한 베드로를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질타하는 장면인데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구절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1)는 것과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18)였다. 고넬료는 경건한 로마 백부장으로 구제와 기도에 힘썼던 사람이었다. 물론 그도 짓는 죄가 있었겠지만,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 지은 죄를 슬퍼하며 뉘우치고 그것을 버리려고 하는 성격을 띤 회개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한 회개는 이방인이지만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결국 회개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거기서 내가 온전히 새롭게 되는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 품에 안기면서 완전히 회복되었듯이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회개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깨닫고, 좋은 교훈 찾는 식의 말씀 묵상이 아닌 ‘내 안의 부족과 허물과 연약을 발견하는’ 즉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아야 하는 내 실상을 들여다보고’ 그래서 간절하게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나아가는 시간’이 말씀을 볼 때마다 일어나야 한다.
회개는 비도덕에서 도덕으로 옮겨가는 과정 정도가 아니라 죄와 허물을 가진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서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