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가 무엇인지를 배워가고 있다. 너무나 익숙한 단어지만 새롭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회개는 불교의 자기성찰과 다르다. 그건 자기중심적 명상이다. 나도 한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성찰, 자기 안의 죄를 분석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더 알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 적도 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죄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불교식 자기성찰은 아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지만 자기 안의 죄와 허물을 인지하는 데서 오는 겸손한 태도는 갖게 한다. 그래서 대중에게 인기 있는 스님의 이미지가 온유하다는 인상이 있는데 그건 자기성찰로 인해 자기 안의 죄를 보게 됨으로 자연스레 갖게 된 태도이다. 그러나 불교의 한계는 그 죄와 허물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안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고행으로 해결하겠다는 건데, 그건 마치 애당초 걸을 수 없는 불구의 몸을 가진 자에게 일상의 삶을 등지게 한 채 결과적으로 효과 없는 고통만 과중시키는 몰이해적인 처방이다.
그러나 복음은 근본적으로 걸을 수 있도록 하는 수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뤄졌으니 그것에 의지해서 재활치료하듯이 순종하면 실질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간과했다고 하는 부분은 자기 행위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어서 자기 안 욕망을 찾는 자기성찰과는 다른, 온전한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기에 자기 안의 교묘한 죄와 허물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건 자기성찰로 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서, 살아있는 좌우에 날 선 말씀의 검으로 찌르고 쪼개어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5-10)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안에 거하면 내 안의 죄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때 죄의 자백 즉 그 죄를 집중적으로 십자가 보혈로 다루게 되면 깨끗게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죄를 건성으로 다루면 깨끗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자기 안에 죄를 들여다 보고 다루는 자이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의 첫 메시지도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회개하겠다고 자신에게 나아온 무리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열망, 갈망,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과 생각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여기서 회개의 두 번째 중요한 부분이 나온다. 성경을 묵상할 때 깨달음 내지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에 머물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행동하고 실천하는 순종이 있어야 한다.
“주님, 매일 회개 하는 제가 되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