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중에 가장 본받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내게 물어보면, 진짜 빈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우리 삶의 전부라고 할 만큼 중요한게 인간관계인데,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나로서는 이 부분에 부족함을 느끼다보니 늘 고민인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이번 주간에 예레미야 애가를 묵상하는 데 하나님의 사랑하는 방식을 다시 상기하면서 마음이 벅차올랐다. 5장 1절에서 14절까지 말씀이었는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로 시작해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끔찍하게 살육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전쟁터의 비참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며 탄식한다. 내용을 보면 전혀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릴만한 본문이 아닌데도 하나님의 사랑에 벅차다 못해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처음으로 ‘경외’가 그분의 깊은 사랑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두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왜 예레미야는 그 비참한 상황을 하나님더러 기억하고 살펴보시라고 한 것일까?’였다. 그것에 대한 답은 하나님은 너무나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니까 어려운 상황을 말씀드리면 달려와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왜 사람 중에서도 힘들다 하면 달려오는 사람이 있고 남의 일처럼 여기고 지나가는 냉정한 사람도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긍휼이 많으시니까 이렇게 비참한 상황을 말씀드리면 그냥 있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한 것이었다.
두 번째 질문은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놓을 정도로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 왜 자기 백성이 그렇게 처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보시면서도 가만히 계신 것일까?’였다. 수요예배 때 설교하고 있는 에스겔서의 말씀과 연결지어 묵상해보니 그런 환난 가운데 이스라엘을 백성을 두어야 할 이유가 이해되었다. 그렇게 해야만 찌든 죄악에서 벗어날 열망을 갖고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일방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몰라라 하며 무관심한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정의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수많은 가슴앓이와 인내와 희생이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능력과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지식이 있음에도 우리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존종하시고, 그것으로 인해서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를 모진 인내와 깊은 지혜와 생명을 다한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 그 사랑의 방식이 너무나 경이로울 뿐이다. 바울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긴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벅차했던 그 심정이 느껴졌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