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장 흔하게 사용해서 익숙한 말이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성경의 최고 중요한 계명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기도해도 ‘사랑의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 그분을 부른다. 그런데 가장 오해하고 있는 단어가 이 사랑이다.
누가 ‘당신은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내가 대개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사랑이 꽤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나는 법도 잘 지키는 사람이고, 누가 내게 부탁을 하면 잘 들어주려고 하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마음도 드는 것을 보면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런 대로 착하고 사랑이 꽤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착한 것을 내포하지만 착하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이 많은 것은 아니다. 착한 것은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하고 도움을 주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연약해서 경건하게 살지도 않고 오히려 죄인이 되어 하나님을 원수처럼 대할 그 때에도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결국 사랑은 내게 상처를 입히고, 나를 힘들게 하는 그런 류의 사람까지도 품어주고 존귀하게 여겨서 그를 위해서 나의 귀한 것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는 것이다.
착한 것은 연약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오히려 연약한 사람들이 더 착할 가능성이 많다. 세상에 때 묻지 않는 순수한 아이들, 가나안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더 착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 착한 사람들이 세상에 못된 사람에 의해서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면 화는 나는데 그것을 대항할 만큼 모질지 못해서 혼자 밤잠을 설치면서 끙끙거리게 되고 끝내 그 멍든 가슴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울증으로 치닫게 된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린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독하지 못한 너무 착한 사람들이 많다. 정확하게 말하면 착하기는 한데 사랑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 실망과 상처 앞에 마음이 무너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사랑을 천성적으로 갖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이후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어서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살아가다 정말 큰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자신의 가치가 무너지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감당 못할 큰 상처를 받는 일을 만나게 되면 어느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우울증이 찾아오는 것이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함으로써 내 안에 자라가는 생명이다. 이 사랑을 키우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랑은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성령이 내 안에 이식하는 열매와 같다(갈 2:22). 사랑은 단기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오래고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내 안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없다고 자책할 일도 실망할 일도 아니다. 진리에 순종하면 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