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긍휼’에 대해서 주께서 가르쳐주고 계시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엡 2:4).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도 그 긍휼 때문이었다(딛 3:5). 보통 긍휼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볼 때 갖는 마음이고,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보면서 갖는 마음인데 그건 동정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하다. 노숙자를 바로 볼 때 드는 마음이라고 할까?
동정은 자기 자리에 있는 채로 ‘참 안 됐다.’고 느끼는 마음이라면, 긍휼은 그 나은 자리에서 내려와 그 사람이 처한 낮은 위치에 기꺼이 내려가서 그와 하나 되려는 마음이다. 예수께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한에게 다가왔을 때 ‘내가 오히려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내게 오시나이까?’ 되물었을 때 ‘허락하라.’ 하시며 세례를 받으셨던 그 주님의 마음이다. 죄 없으신 그분이 죄 있는 우리의 위치까지 내려와서 하나가 되고자 하셨다. 이처럼 긍휼은 둘 사이의 많은 차이와 간격을 없애고 완전히 하나 되게 한다. 그래서 긍휼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나와 분명 다른데 차이를 못 느껴 마음이 무장해제 되고 그에게 이상하게 끌리는 것이다.
내가 긍휼의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과 다른 영혼을 잇는 브릿지가 된다. 즉 주님과 내가, 나와 그 영혼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때 주께서 나를 통해서 그 영혼과 접촉해서 축복하고 위로하고 치유하고 세우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긍휼은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가는 통로인 셈이다. 예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긍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적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게 아니라 옆에서 수평으로 흐르는 것이다.
주께서 당신의 일꾼을 부르셔서 마지막까지 가르치는 것이 긍휼이다. 오랜 기간 하나님과 동행한 아브라함이 멸망 당하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놓고 기도할 때 그 긍휼이 있었고, 요셉이 오랜 연단 후에 자신을 죽이려 하고 노예로 팔아버린 그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역시 그 마음이 있었다. 모세도 40년 미디안 광야생활 후에 다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광야로 인도할 때 그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멸망 당할 직전에 하나님께 생명 걸고 기도할 때 가졌던 마음이 긍휼이었다. 다윗도 사울에게 수년간 쫓겨 다니면서 그 마음을 배워서 두 번이나 그를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살려주었다.
우리가 이 긍휼을 가지려면 자기중심적인 교만한 마음이 깨지고 낮춰져야만 한다. 그래서 모든 믿음의 사람은 많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에 빚어지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긍휼의 마음이 자랄 때 비로소 주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긍휼은 주님과 내가 하나된 마음이다. 스스로 자신은 다른 이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남을 판단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이 하신 명령을 다시 되새겨본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