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눅 5:24)
친구들이 중풍병 걸린 한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서 고치고자 했는데, 막상 가니 그 집에 사람이 너무 꽉 차 있어서 지붕으로 침대를 올리고는 그 지붕마저 뜯어내서 침대째 예수님 앞으로 내렸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이 기적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을 고치는 것보다 죄 사함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것이 생소하다.
그 환자는 침대에 누워 있으면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몹시 괴로워하며 살았던 것일까? 어쩌면 자신이 그 전에 지었던 죄들이 생각나서 괴로워하며 살았던 것을 예수님이 다 아신 것일까? 중풍병이라는 육신의 병보다 스스로 자기 인생을 비관하는 그 마음의 병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던 것이다.
여기서 죄 용서를 받는 것과 받지 않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가 예수께 나아갔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이 죄 사함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데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죄 사함이란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곧 내가 받아 들여졌다는, 내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의 잘못과 부족에 대해서 지적할 때 순간적으로 변명하고 화를 낼 수 있지만, 돌아서서는 혼자 자신을 주목하면서 그 말들에 한편으로 동의가 되어서 ‘스스로 나는 왜 그럴까?’ 스스로 자책하며 다운될 때가 많다.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태어났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 상태로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의로우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내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면 죄 사함 받아서 의로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다. 너무나 눈물겨운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기계적으로 들으면 죄 용서가 생명 없는 교리와 마치 하나의 수학 공식 풀 듯이 들려질 수 있다. 그러나 죄 용서의 선포는 나라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치 있다는, 하나님의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고 전달하는 것이다.
이 죄 용서의 확신, 여기에서 나오는 그 평강을 누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죄 용서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 더 나아가 나도 예수님처럼 이런 죄 용서를 내 주변 사람에게 실천하며 살아야겠다. 하루에도 수없이 내 주변 사람들의 허물과 실수를 보면서 마음 상해할 때가 있을 텐데, 그런 자들에게 당신이 소중하다고 알려주는 사람,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이런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판단하고, 정죄하고, 수군거리는 것이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인데, 주님은 ‘네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그렇게 대접하라'(마태복음 7:12)고 하셨듯이 말이다. 죄 용서에 대해서 새롭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주님의 그 용서하심을 배우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주님을 닮아가도록 이끌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