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장 많이 묵상하는 단어가 ‘은혜’이다. 이 은혜는 세상에서 생소한 것이다.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음식과도 같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 이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지만 가장 모르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은혜는 내가 연약해서 경건하게 살지 않고 또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죄인으로 살고 있을 그 순간에도 나를 소중하고 가치 있고 존귀하다고 여겨서 받아주는 것이다. 이 은혜의 반대는 정죄이다. 정죄는 누군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그 행위만 그릇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 사람의 가치까지 매겨서 평가하는 것이다.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거나 기대한 만큼 결과를 내지 못했을 때 그 존재마저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이 정죄이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진리와 불의를 판단하는 것은 정죄와 다르다.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정죄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정죄로 가득 차 있다. 점수를 매기는 학교와 회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은혜로 다스려져야 할 교회와 가정마저 사람을 쉽게 정죄할 수 있다.
정죄는 다른 사람을 쉽게 지배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왜냐하면 일단 그 정죄감을 주면 내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듯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정죄감을 많이 받고 자라난 아이는 커서 자존감이 너무 낮아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보시고 정죄하기보다 긍휼히 여기셨고, 그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는 존귀하다는 것을 십자가에 친히 죽어주시는 것으로 증거해 보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는 누구도 정죄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이 우리를 정죄할 때 그것을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잘못한 것, 실수한 것, 부족한 것은 인정하고 사과도 하고 용서도 구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면 안 된다.
스스로 자기를 정죄하는 것이 죄책감이다. 이것은 죄를 회개하는 것과는 다르다. 회개는 하나님께 나의 죄와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용서와 긍휼을 구하는 것이다. 이런 나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감사가 있다. 그런데 죄책감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라며 자신의 연약과 부족을 인정하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감정이다. 모든 사람은 타락해서 마음이 부패했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이다.
정죄와 죄책감이 형제지간이듯 긍휼과 용서도 형제지간이다. 같은 잘못을 해도 전자는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는 태도라면 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치 있다고 여기는 태도이다.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대개 낯선 것이지만 꼭 배워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로마서 8:3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