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단이 속한 개혁주의 신앙에서 예언은 설교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100% 동의한다. 하나님께서 오늘 저 강단에 서시면 하실 그 말씀을 대변하는 것이 설교다. 그래서 나는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갈 때마다 하나님께 ‘먼저 올라가시지요.’라고 말하고 강단과 가까워지면 ‘먼저 저기 서시죠.’라고 말씀드린다.
신학을 하기 전에는 성경 읽으면서 내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이나 깨달은 것들을 나누거나 가르쳤다. 소위 Q.T(Quiet Tim)라고 하는 개인 말씀묵상을 통해 발견한 것을 나누는 식이다. 생명력은 있는데 그 영향력의 범위가 내 울타리를 조금 넘나드는 정도의 너무나 개인적인 삶에만 포커스가 많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신학을 하면서 원래 성경을 기록한 광대한 세계를 만났다. 그 때 저자가 이런 목적에서 그 교회에 편지를 썼구나. 마치 진귀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흥분하며 공부를 했었다. 그러나 그 때의 설교는 다분히 과거적이었다. 가끔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걸맞는 교훈이 되는 약간의 문장으로 성도들에게 전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 책이 쓰여질 당시의 향내가 물씬 풍기는 설교, 개인적인 능력이 있어서 잘만 응용하면 오늘날에도 훌륭하게 적용 가능한 성경적인 원리들을 운반해주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여전히 직접적이고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적용이 많이 부족한 설교였다.
지금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일 많이 신경 쓰지만 솔직히 힘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당신의 자녀들에게 하실 말씀을 듣는(?) 것이다. Q.T수준에 머무는 설교처럼 너무 개인적이지도 않고, 신학적인 설교처럼 과거적이고 원론적이지도 않고, 오늘날 구체적인 이슈를 매일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전체에게 전하지만 개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설교하고 싶은데 참 어렵다. 웬만한 몇 권의 주석을 보면 그 당시 이 성경책이 쓰여질 그 때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고, 훌륭한 강해서를 보면 오늘날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원리도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설교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 가장 본문의 의도에 맞아야 하면서도 동시에 지금 회중석에 앉아있는 성도의 현재 삶과도 맞아떨어져야 한다.
내 욕심이 과한지 모르겠지만 우리 셀리더들과 성경공부할 때도 이런 식의 태도를 요구한다. 본문을 주석책 보며 해석하고, 그런 객관적이고 성경적인 정보를 가졌으면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나는 이 과정이 생명을 낳기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힘들지만 흥분되는 감동이 있고 사람을 살리는 생명을 공급받는 경험이 있다.
수련회 설교를 준비하는데 한 주간도 해산하는 진통을 겪듯이 보냈다. 내가 어떻게 말씀을 준비하는 지 잘 아는 아내는 곁에서 여전히 끙끙거리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더 숨이 막힌다고 그런다. 여러분의 기도가 더 필요한 것 같다.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