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예수님이 가장 싫어한 행동이 바리새인의 외식이었다. 기도도 금식도 성경암송도 많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칭찬하기보다 도리어 나무라셨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 칭찬듣기 위해서 그렇게 했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못한다고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율법의 중요한 정신인 공의와 긍휼(인자)과 하나님에 대한 갈망(믿음)은 없이 형식적으로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그 형식까지 필요 없다고 하시지 않았다. 이것(정신)도 행하고 저것(형식)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마 23:23).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잘못이라 하신 율법적인 외식이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의롭다는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생명력 없이 습관적으로만 행해지는 자세였다.
바울이 율법적인 행위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그의 여러 서신들에서 언급했는데, 대부분은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 그렇게 했지 율법 자체를 필요 없다 하신 적은 없었다(롬 7:12, 16). 오히려 성령이 내 안에 오신 후에는 구약시대보다 더 확실하게 그것을 지킬 수 있고 또 지켜야 한다고 했다(롬 8:4). 예수님도 내가 율법을 폐하지 않고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다(마5:17). 율법 가운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그것의 그림자와 상징 역할을 했던 제사제도나 정결예식 같은 의식법은 없어졌지만 그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그 외에 윤리적인 계명은 실제적인 행동으로 드러난 것만 죄가 아니라 마음으로 음욕을 품거나 미워하는 것도 간음이요 살인이라고까지 해서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그리고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시민법과 같은 경우에는 현대에 맞게 그 정신을 계속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다는 식으로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긍휼과 정의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동기가 되어서 행하는 신앙적인 헌신과 경건한 행동을 율법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은혜의 복음을 가장 소리 높여 외쳤던 바울도 자신의 몸을 애써 복종시키는 훈련을 했고(고전 9:27) 디모데에게도 그것이 금생과 내생에 다 유익하다고까지 하며 자신을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하라고 명령했다(딤전 4:8).
그래서 하나님을 사모하고 다른 사람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열심히 예배와 성경공부와 기도하는 것을 율법적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도리어 그것을 헌신이라고 부르고 존중하고 본받고자 해야 한다. 다니엘이 바벨론 왕이 준 포도주와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 것, 베드로와 요한이 하루에 세 번 성전에 올라가 기도한 것은 율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었다. 우리의 나태함과 방종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율법적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은혜는 율법보다 훨씬 더 헌신적인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