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렌트우드로 가는 떠들썩한 기차 안 나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Door to door 전도-낯선 집의 문을 두드려 복음을 전한다. 모처럼의 휴일, 혹은 뜻밖의 이른 퇴근으로 집에서 편히 쉬고 있는 오후 예기치않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 맞으러 나갔을 때 낯선 타인 두명이 내 집 문앞에 서 있는 경험이 찾아온다면 어떤 기분일까. 중2 어느 오후 그날따라 일찍 돌아온 집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에 엄마? 하며 나갔더니 말끔하게 다린 흰 셔츠를 줄이 선 바지 안으로 곱게 넣어 입고 크로스백과 검은 명찰을 단 두 외국인 청년이 서 있었던 기억, 그들은 어금니가 보이도록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괜찮아요. My mom said stranger danger. 그런데 이제 내가 그 어금니 웃음 청년 입장이 되어야 하는 입장이다.(물론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그들의 것과는 달리 진리임을 고백한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친구들도 어쩐지 조금은 어색해 했던 것 같다.
여러 생각을 하다 어느새 도착한 어라이즈 캠프 장소엔 마치 여름 수련회 같은 설렘이 있었다. 어떤 이는 뉴욕에서, 또 한국에서, 그리고 웨일즈에서도 왔다고 했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불과 한시간 남짓 오는 동안 부지런히 고민한 나(사실 고민의 절정은 어라이즈를 신청하기 전이었음을 고백한다), 풀타임은 부담이니까 여유있게 파트타임만 참여하자 했던 나에게 누군가가 어라이즈를 위해 두 주의 휴가를 내고 아부다비를 거쳐 스무시간을 날아왔다고 했다. 세상에, 나는 그냥 묻어가는 섬김이 편한 사람인데 이사람들은 너무 강하잖아. 어색했다. 모두가 나와는 다른 믿음의 용사 같았다. 하지만 곧, 오랜 시간 이방인으로 살며 터득한 방어기제라고 우겼던 선입견과 판단의 습성이 무색하게 훈련과 나눔이 계속될수록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각자의 힘든 상황을 안고 있음에도 용기있게 이 자리를 찾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 은혜가 나에게 족하니 이는 주의 능력이 나의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가장 힘든 첫 대면의 어색함이 사라지니 오랫동안 바쁜 삶 가운데 느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사랑이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음이 보였다. 사도행전에서 읽었던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공동체, 그 초대 교회의 모습이 이것일까 싶을 정도였다. 캠프에서 며칠간의 훈련 후 서로를 맡은 교회로 파송하는 날에는 무언가 결연한 마음이 들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 나누며 마무리짓는 시간엔 천국에 가면 이렇게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찰까 하는 기대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어라이즈에 대해 마음이 있지만 파트타임으로 참석할지 풀타임으로 참석할지 고민하시는 분이 있다면 풀타임 전도훈련 캠프에 참여하는 것을 진심으로 추천드린다.) 이름만으로 부담스러웠던 도어 투 도어 전도 또한 내 머릿속 고정관념들을 깨주었다. 나라면 이런 대접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친절하게 집 안으로 따뜻하게 맞아주던 분들 하며,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두드렸던 천개의 문들의 열매로서 주일 예배에 처음 찾아오셨던 할아버지와 손녀의 나눔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예수님 마음의 간절함이 눈 앞에서 느껴지는 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잃어버린 누군가를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하건대 주께서 버려질 나의 삶도 이렇게 찾아내셨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러 말할 수 없는 감사의 뜨거움 또한 느껴졌다. 결론을 말하자면, 어라이즈의 참석은 내 삶에서 가장 값진 시간 중 하나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겠다. 나 또한 교회라는 안전한 울타리 밖이 거칠고 두려웠지만 사실은 그곳이 우리 믿는 자들의 향기가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곳이라는 것을 용기내어 나가보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터이니.
우리가 이곳 런던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크게 고민하는 것들 중 하나로 거취의 문제가 있다. 졸업하고 나서도 영국에 있고 싶어요 워킹홀리데이가 되게 기도해주세요 취업비자를 받기 힘들다던데 대단하시네요 같은 얘기들에 우리 모두가 익숙한 것을 보면 참으로 그러하다. 나 또한 비자와 영주권을 신청할 때 설마 내가 미처 몰랐던 부분이 결격사유가 되어 행여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함으로 노심초사 했었다. 이제 우리가 기도와 예배에서 많이 듣고 읊어 익숙한 ‘하늘나라 천국의 시민권’ 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내가 이것을 과연 얻은 자인가고 자문할 때 손에 만져지는 비자 카드만큼 나를 떨리게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내 시선이 이 땅에서 잘 살아내는 것에만 맞춰져 있는 까닭이다. 돌아보면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세상을 사랑하는 시간을 마치시고 원래 앉으셨던 왕좌로 돌아가실 때 하신 부탁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한가지셨다. 그래 굳이 따지자면 땅 끝까지 가는 일 부터가 어려울진대 우리는 모두 정든 집 떠나와 이 머나먼 런던 땅 끝 이방 나라에 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아직 주의 사랑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과 나누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면 어떨지 싶다. 누구나 가슴속에 상처나눌 이야기 하나쯤은 있는 거니까. 그래서 나중에 천국에서 예수님 만나 뵐 때, 누구누구야 있잖아 그 때 어라이즈 말야, 네가 그 문을 두드릴 때 나도 두근거리면서 너 뒤에 서 있었다? 어휴 어찌나 떨리던지! 하시는 그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직면하는 특별한 즐거움이 준비되어 있을 것을 기대해보자. 바울선배의 말처럼, 우리의 자랑의 면류관은 이땅의 비자도 지위도 높은 연봉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의 그 앞에 얼굴을 보고 설 그 순간이니까. (아, 물론 어라이즈에서 지금의 약혼녀를 만난 것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