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 6:31-34)
이 말씀은 예수께서 산 위에서 가르치신 말씀(산상수훈)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것이 요구하는 바른 삶(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핍된 이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느끼는 필요에 대한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열망만 있을 뿐 평생 염려하다가 생을 마감할 수 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그것을 해결하려는 계획이나 노력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주님은 하늘을 나는 새와 하루 있다가 지는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들면서 그 하찮은 것들도 하나님께서 다 먹이고 입히고 있으니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매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면 될 것이지 그것에 마음과 생각이 함몰되어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와 그 의가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게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결국 이 세상의 필요에 대한 염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분과 지속적인 교제를 가지면서 그분에 대한 신뢰를 키워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염려의 크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의 깊이를 가름 하는 기준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보듯이 지나친 염려는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고(마 13:22), 믿어도 그것이 어리다는 증거가 된다(마 8:26).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헌신해서 그분에 대한 믿음이 자라서 염려를 다스리게 되면 자연스레 나타나는 삶의 특징 하나가 있다. 그것은 ‘오늘’에 대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염려는 힘든 현실을 피하려는 욕구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자라면 미래를 맡기게 되는 동시에 오늘 하루에 충실하게 한다. 그래서 위의 성경구절을 보면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멋진 말로 결론짓지 않고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로 말씀으로 끝난다.
염려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내일’에 포커스가 되어 있다면 믿음은 ‘한 날’이라고 하는 오늘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현실에 대한 의미를 잃고 먼 미래만 바라보며 멍 때리며 살아간다. 마음은 붕 떠 있고 현재의 일과 상황에서 떠날 구실만 찾는다. 하지만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오늘’이 중요하고 ‘오늘’이 의미가 있고 ‘오늘’을 감사한다. 힘들어도 먼 미래는 주님께 맡기고 ‘오늘만’ 감당하면 된다는 여유를 갖고 삶의 무게를 담담히 받아낸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고 한 날을 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