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나이 50에 영어공부를 해서 60에 미국 명문대에서 영어로 강의를 했다는 한 여성의 동영상을 최근에 본 적도 있다. 지식이나 언어도 이렇게 배워가야 하지만 인격이 성숙해지는 것도 계속 배워가야 하는 것 같다. 나는 요즘 은혜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사람의 연약함과 허물을 괜찮다고 하며 참아주며 받아주면서 여전히 소중한 사람으로 여겨주는 태도 말이다.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것이 사람에 대한 실망감이다. 화나게 하고 낙심시키고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계속 마주하는 것만큼 괴로운 것은 없다.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주지 못할 때 갖는 감정이 죄책감과 자책이다. ‘나는 왜 이럴까?’, ‘왜 나는 바뀌지 않을까?’, ‘언제까지 이렇게 못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나?’, ‘왜 바보같이 또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 거지?’ 이렇게 나 때문에, 가까이 있는 너라는 사람들 때문에 매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복음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너는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께서 인간이 되어 오셔서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셔야 구원받을 수 있을 정도로 문제가 많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나의 부족함을 볼 때마다 변명하거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니 삶이 편안해졌다.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나 형제 없이 할머니와 살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다. 대학교 때 예수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교회에서 만난 믿음의 식구들이 나를 돌보아주어서 그나마 사람 구실 하는 자가 되었다.
큰딸은 진짜 성격이 좋아서 주변에 친한 사람들이 많다. 꽤 큰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사진을 두 번 나눠 찍을 정도였다. 이번 주에 엄마와 통화하면서 ‘아빠와는 여전히 어색해. 아마 동생들도 그럴 거야.’라는 말을 했다며 아내는 충격이라고 말했다. 교회사역이 저녁과 주말에 몰려 있다 보니 집에 있어도 아이들과 편안하게 얘기하고 놀아주지 못하고, 시간이 있어도 늘 생각할 게 많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아이들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부모와 형제들 사이에 살아본 경험이 없으니 대화하는 것이 서툴 수밖에 없다.
옛날 같으면 ‘목사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을 감수해야 해!’, ‘왜 그래도 아빠는 나름 최선을 다했어!’라고 변명하고, 돌아서서는 못난 자신을 보며 자책하며 다운될 수도 있지만, 이제는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 주님의 은혜로 배워가야지 하는 마음을 먹는다. 십 분짜리 사건을 1시간으로 늘여서 대화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내를, 평소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얘기를 저렇게 길게 하나, 만나는 사람마다 마치 처음 얘기하듯이 저렇게 반복해서 말하는 게 신기하다’ 생각했는데, 요즘은 일상의 작은 일에도 공감해주는 대화를 배울 최고 훌륭한 선생으로 하나님께서 내 곁에 아내를 보내주셨구나 생각하니 감사하다.
자기 연약과 부족을 인정할 줄 알아야 비로소 배울 수 있는 것 같다. “주님, 더 가르쳐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