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섬긴다’는 말이 있다. 남들이 하기 힘든 궂은 일을 하는 것이 섬기는 것일까? 분명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주간에 섬기는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내가 정리한 말로 한다면, 섬긴다는 것은 ‘그 사람 곁에 함께 하는 것이다’. 그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 오랜 기간 함께 한 부부, 부모와 자녀일지라도 삶을 공유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그렇게 살아다는 걸 이번 주에 새삼 깨달았다.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혼자 자라온 사람이어서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그래서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었어도 울타리 쳐진 나만의 삶에 집중하고, 가족들의 삶은 요청이 있을 때-아내의 볼멘소리와 막내 아들이 ‘아빠’를 애타게 부를 때 혹은 내가 가족 봉사로 운전이나 설거지를 해야 할 그때 내 시간을 내는 식이었다. 대부분은 내 삶 안에 들어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고만 했다.
내게는 그 혼자 보내는 시간이라는게 교회사역이나 세계 선교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에 몰입해 있는 나의 삶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정당화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었도 내가 마땅히 섬겨야 할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핑계거리로 삼았기에 나는 이기적으로 살아온 것이다.
집에 있어도 다 자기만의 스케줄이 있다. 가족이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각자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만일 가족 중에 나의 스케줄을 침범하기라도 하면 예민하게 굴 수 있다. 사춘기 이후의 나이는 각자 그렇게 보내는 것이 괜찮을 수 있지만, 어린 자녀일수록 자기 삶에 함께 해 달라고 떼를 쓴다. 육아 스트레스라는 게 나만의 삶을 포기하고 그 아이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 싫어서 생기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의 삶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다.
8세 여준이는 항상 자기 삶에 참여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가족들은 다 자기 일이 있고 자기 시간을 더 갖고 싶으니까 ‘혼자 그냥 해’라고 하기 일쑤다. 아내에게 많이 맡겼던 여준이의 삶에 참여하기 위해 내 삶을 일부 포기하기로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같이 QTin 묵상을 했다. 나란히 앉아 시작 기도를 한 후 그 날 본문을 세 번 돌아가면서 읽고, 설명하는 부분도 읽고, 옆 페이지에 나오는 문제도 풀고, 기도문도 만들어보고는 그것으로 마무리 기도를 했다.
이어서 하루에 정해진 2페이지 수학문제를 풀었다. 나눗셈을 응용하는 문제였는데 여준이가 이해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평소에 한 페이지 푸는 데도 몇 시간 걸린다고 엄마에게 야단을 많이 맞았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옆에서 내 할 일을 하지만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같이 풀어주었다. 이렇게 공부가 끝나면 여준이가 원하는 놀이를 같이 했다. 최근에 여준이가 페트병 두 개를 가지고 페인팅과 함께 화산폭발하는 것을 만든 적이 있는데 그것을 같이 하자 해서 가르쳐주는 대로 따라했다. 대개 좋아했다. 그리고 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는 일도 했다.
비로소 알았다. 섬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함께 하는 것임을. 계속 회개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