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이 가진 연약과 부족과 죄악이다. 이것은 나에게서도 발견되고 늘 상 내가 가까이하며 지내는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나는 왜 자꾸 이럴까?’, ‘언제까지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할거니?’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해서 그분을 떠난 후로 우리가 살고 있는 만물에도 문제가 생겼지만 내 마음이 가장 부패해졌다고 말한다(예레미야 17:9).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받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사람들의 못난 인격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 때문이다. 그것은 감정적으로는 서운함, 분노, 미움 등으로 발전하게 되고, 심하면 육체적 정신적 영적 질병을 유발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용서하고 용납하는 사랑이다. 이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진짜 이 길밖에 없다! 이것을 하지 않는 그 기간만큼 우리는 고통을 당한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다 보니, ‘네가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마 6;15), ‘그 미움을 계속 간직하면 사탄이 네 삶에 들어갈 것이다’(엡 4:25-26) 라고 심각하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한 말씀인데, 상처받은 입장에서 용서하고 사랑하고 그를 축복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힘이 없으면 가만히 당하고 있을 뿐이지만 마음과 생각은 미움과 증오로 가득하고, 뒤끝이 없는 성격이면 한바탕 부딪히기라도 해서 상한 마음을 쏟아내기라도 해서 담고 있는 것보다야 낫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운 감정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법을 그리스도 안에서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기가 무척 힘들 수밖에 없다. 이것을 배우지 못하면 내가 당한 피해와 그것을 통해서 내 안에 생긴 상한 마음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나누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그 사람도 그 관점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안경을 쓰게 되고, 그 상한 마음도 이식받게 되어서 같이 미워하는 동조자를 만들어낸다. 같이 힘들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좋은 마음을 먹기로 다짐한다 해도 관계는 더 꼬이게 되고 나중에는 그것을 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쉽게 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허물, 부족, 죄성을 받아내는 것이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유일하게 우리에게 주고 가신 새 계명이 이것이다(요한복음 13:34-35).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능력이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가르침은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마태복음 7:1-12). 비판할만한 허물과 잘못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 말씀이다. 결론은 ‘네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그대로 그를 대접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 크나큰 업적을 남길 만큼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라도 이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은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다. 그래서 날마다 그분을 찾게 되고, 그분의 말씀에 결국 순종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