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 MIND

“사랑이 많다는 것은” – 이영주 목사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지만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가 ‘사랑’이다. 나는 정말 사랑이 많은 사람인가를 수시로 자문해 본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했기 때문에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 중에서 대개 사랑이 많아 보이는 분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의 형상이 흔적으로 남아 있으니 일반은총으로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가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면서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배워가는 것들이 있다. 우선 사랑과 착한 것은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이 둘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이 많은 사람이 착한 것은 분명하지만 착하다고 사랑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비유를 든다면 착한 것은 유아기적인 사랑이라고 보면 되겠다. 착한데 심성이 약하면 감당하기 힘든 극한 상처를 받았을 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해 우울증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모진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나는 뒤 끝이 없다면서 시원시원하게 자기 감정을 다 쏟아내는 사람은 적어도 본인은 상한 감정을 쌓아두지 않기 때문에 우울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분들은 대부분 착하신 분들이 많다.

‘사랑은 강인해야 한다’는 책 제목처럼 사랑은 큰 상처, 마음을 다스리기 힘든 분노의 순간에도 어느 정도의 절제와 지혜를 가지고 자신에게 함몰되지 않고 그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한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될 수 있는 ‘여전히 죄인의 상태’에 살을 때에도, 그분을 원수처럼 대하는 그 순간에도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게 하심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증거해 주셨다(롬 5:8, 10).

그래서 착함은 일반은총으로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만이 실천가능한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믿어도 그분과의 관계에 헌신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그 사랑이 내 안에 이식될 수 없다. 그래서 성장하지 않는 신자는 일반은총으로 주신 착함에 있어서 믿지 않는 분들보다 훨씬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삶을 통해 완전한 만족이 채워지고, 실패와 아픔의 광야를 지나면서 내 중심적인 죄성이 쌓아놓은 콘크리트 벽처럼 단단한 나의 성벽이 무너져야 한다. 나, 내 가족, 내 교회, 내 민족… 이런 자기 왕국 안에서 잘해주는 정도의 사랑은 그리스도 밖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성격적으로 붙임성이 있고, 대접을 잘하고, 공감력이 뛰어나 눈물이 많다 해도 곧 사랑이 많은 것은 아닐 수 있다. 도리어 냉정한 것 같고, 일 중심적인 사람 같지만, 자신의 행복과 편리함을 희생하면서까지 누가 알아주기를 기대하지도 않은 채 도리어 오해와 비난과 배신을 감수하면서 이웃과 다른 민족을 생각하는 선교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지닌 사람일 수 있다. 주님의 사랑은 정말 다른 것 같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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