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한달동안 북클럽에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함께 읽었다. 책을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작가와 제목은 한번쯤 들어봤을,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다.
‘죄와 벌’은 러시아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줄여서 ‘로쟈’)가 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이후 불안에 쫓기며 겪게 되는 이후의 과정을 탐정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 소설의 탁월함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집요한 심리묘사에 있는데, 한국어 번역판 기준 총 800페이지에 이르는 긴 호흡을 통해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로쟈는 황당한 이유로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고 나선 가지고 있는 전재산을 불행한 이웃에게 넘겨주는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밤낮으로 그를 억누르는 죄책감에 자수를 결심했다가도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어머니와 여동생에겐 마음이 따뜻한 아들이자 오빠로 기억되고, 가장 가까운 친구는 그를 때때로 냉정하고 어두운 사람으로 증언한다. 작품 중반에 이르러 처음엔 우발적 행동처럼 보였던 그의 살인이 사실 오랜기간동안 준비된 확신범죄였단 사실이 들어날 때쯤 우린 당혹감을 느끼며 묻게된다. 대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모든걸 간편하게 이해하길 원하는 우린 종종 누군가의 표정, 외모, 말투, 혹은 그에 대해 건너들은 단편적인 정보와 나름의 경험을 종합해 한 사람에 대해 쉬운 결론을 내리길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의외의 면을 접하며 멋대로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낀적이 다들 한번쯤은 있지 않은가.
‘죄와 벌’의 로쟈,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든 홀필드, ‘이방인’의 뫼르소와 같은 인물들을 만나며 우린 어그러진 인간의 내면과 그 복잡북클럽 7월의 책을 읽고 – 박형배
7월 한달동안 북클럽에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함께 읽었다. 책을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작가와 제목은 한번쯤 들어봤을,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다.
‘죄와 벌’은 러시아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줄여서 ‘로쟈’)가 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이후 불안에 쫓기며 겪게 되는 이후의 과정을 탐정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 소설의 탁월함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집요한 심리묘사에 있는데, 한국어 번역판 기준 총 800페이지에 이르는 긴 호흡을 통해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로쟈는 황당한 이유로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고 나선 가지고 있는 전재산을 불행한 이웃에게 넘겨주는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밤낮으로 그를 억누르는 죄책감에 자수를 결심했다가도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어머니와 여동생에겐 마음이 따뜻한 아들이자 오빠로 기억되고, 가장 가까운 친구는 그를 때때로 냉정하고 어두운 사람으로 증언한다. 작품 중반에 이르러 처음엔 우발적 행동처럼 보였던 그의 살인이 사실 오랜기간동안 준비된 확신범죄였단 사실이 들어날 때쯤 우린 당혹감을 느끼며 묻게된다. 대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모든걸 간편하게 이해하길 원하는 우린 종종 누군가의 표정, 외모, 말투, 혹은 그에 대해 건너들은 단편적인 정보와 나름의 경험을 종합해 한 사람에 대해 쉬운 결론을 내리길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의외의 면을 접하며 멋대로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낀적이 다들 한번쯤은 있지 않은가.
‘죄와 벌’의 로쟈,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든 홀필드, ‘이방인’의 뫼르소와 같은 인물들을 만나며 우린 어그러진 인간의 내면과 그 복잡함을 직면하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만약 우리의 24시간 내면세계를 누군가 객관적인 글로 옮겨낼 수만 있다면 내 이웃의 언행 불일치나 모순을 마냥 남의 이야기처럼 바라볼 수 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한 존재인만큼 아마 내 이웃도 그럴거란 사실. 이것은 우리의 형제자매 사랑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CS Lewis는 그의 책 ‘네가지 사랑’을 통해 이러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뛰어넘어 형제자매 속 아름다움을 발견해주는 ‘애정'(Affection)을 사랑의 한 모습으로 이야기한다. 사랑을 어떤 따뜻한 느낌이나 분위기 같은 추상적인 것으로 이해했던 내게 큰 도움이 됐던 말이었지만 지금도 늘 판단이 앞서는 내게 참 쉽지 않은게 바로 이 애정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이 말하는 ‘사랑’ 중 그 어느것도 해당되는 게 없는 날 보며, 때때로 사랑은 ‘그럴 수도 있지!’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곤한다. 누군가의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 앞에서 ‘그래 그렇구나. 너도 그럴 수 있지’. 허허 웃으며 넘어가 줄수 있는 게 긍휼이고 지금 내 사랑의 지경이 아닐까. 내 이웃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애정어린 시선을 나와 우리 공동체 가운데 허락하시길, 2000년전 이미 성육신으로 그렇게 살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려보았다.함을 직면하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만약 우리의 24시간 내면세계를 누군가 객관적인 글로 옮겨낼 수만 있다면 내 이웃의 언행 불일치나 모순을 마냥 남의 이야기처럼 바라볼 수 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한 존재인만큼 아마 내 이웃도 그럴거란 사실. 이것은 우리의 형제자매 사랑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CS Lewis는 그의 책 ‘네가지 사랑’을 통해 이러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뛰어넘어 형제자매 속 아름다움을 발견해주는 ‘애정'(Affection)을 사랑의 한 모습으로 이야기한다. 사랑을 어떤 따뜻한 느낌이나 분위기 같은 추상적인 것으로 이해했던 내게 큰 도움이 됐던 말이었지만 지금도 늘 판단이 앞서는 내게 참 쉽지 않은게 바로 이 애정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이 말하는 ‘사랑’ 중 그 어느것도 해당되는 게 없는 날 보며, 때때로 사랑은 ‘그럴 수도 있지!’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곤한다. 누군가의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 앞에서 ‘그래 그렇구나. 너도 그럴 수 있지’. 허허 웃으며 넘어가 줄수 있는 게 긍휼이고 지금 내 사랑의 지경이 아닐까. 내 이웃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애정어린 시선을 나와 우리 공동체 가운데 허락하시길, 2000년전 이미 성육신으로 그렇게 살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