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장 22절에서 35절까지를 묵상했다. 이방인들이 할례나 모세율법 준수 없이 그저 예수만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예루살렘 지도자 회의의 결과를 이방인 성도가 많은 안디옥 교회에 가서 전하는 내용이다.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몇 가지 이방인들의 악습관만 멀리하라고 말했다.
‘짐’에 대해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한 말이 생각났다. ‘서로 짐을 지라'(갈 6:2)고 했다가 이어서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갈 6:5)는 약간 다른 말을 했다. 앞의 짐은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진짜 무거운 짐이고, 뒤의 짐은 여행자나 군인이 꼭 필요한 물건을 집어넣은 배낭과 같은 짐으로 원문상 단어가 다르다.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할례와 율법의 여러 의식법 등은 이방인들이 져서는 안 될 무거운 짐이고, 대신 그들에게 멀리하라 한 몇 가지 악습관은 지면 좋은 ‘요긴한 것들'(28),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29) 고 한 짐들인 셈이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안디옥 교회에 보낸 그 편지 내용을 ‘위로한 말'(encouraging message)이었다(31). 그래서 그것을 읽은 성도들은 다 기뻐했다. 그 편지를 가져온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유다와 실라도 ‘권면하여 굳게'(encourage and strengthen) 하는 일을 했다(32).
복음이 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묵상했다. 그건 분명 거룩하고 정결한 삶이지만, 마태복음 7장 서두에서 금한 비판하는 태도와는 다르다. 비판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태도, 다분히 정죄하듯 충고한다. 그런데 복음은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면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사람을 바로잡아주려 하지만 자신을 살펴서 그런 시험에 들까 두려워하는‘ 것이다(갈 6:1). 이것이 서로 짐을 져 주는 태도이고, 그리스도의 법-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을 성취하는 것이다(갈 6:2).
예수님께서도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고서, 이어서 ’내 멍에(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다(마 11:28-29). 그것은 분명 책망과 바르게 하는 게 뒤따르는 일이어서 만만찮은 일인 텐데 도리어 그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셨다. 그 이유가 내가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에 우리를 가르쳐도 격려와 위로를 머금은 가르침이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세리와 죄인과 창녀들이 그토록 예수님께 몰려들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던 이유, 결국에 그들의 삶이 놀랍게 변화된 이유도 그분의 격려하는 가르침과 태도 때문이었다.
세상은 평가하고 비판하고 무시하고 상처 주는 말로 가득 차 있기에 하나님은 사람을 대할 때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를 항상 전달하기를 바라신다. 우리를 끊임없이 격려하고 위로하는 방식으로 바른 길로 인도하길 원하신다. 일상에서의 나의 대화, 가르침, 설교 심지어 전도현장에서 믿지 않는 분들과의 대화 속에서 이런 격려성 권면이 부족함을 느낀다. 나도 모르게 내가 좀 더 나은 위치에서 가르치거나 설교했다 싶으면 그 즉시로 성령께서 내 마음에 불편함을 주신다. 복음이 요구하는 이 태도를 더 배워야겠다. “주님, 더 저를 가르쳐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