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근거는 나 자신의 의지나 열정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함에 있다. 내가 대단한 열정이 있고 열심히 뭔가를 하면 믿음이 있고, 풀이 죽어 있으면 믿음이 없고가 아니다. 도리어 내가 결심한 대로 살지 못해 낙심되어도 이런 나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반드시 온전하게 세워주실 것이라 믿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고 바뀌지 않는 사람이어도 하나님께서 마침내 변화시켜주실 것을 믿으면 그게 큰 믿음이다.
갓난아이가 그 가냘픈 손가락으로 아빠를 붙들든, 힘 있는 십대 아들이 아버지를 힘껏 껴안든 그 아버지가 도와주는 능력에는 차이가 없듯이, 나의 어떠함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를 둔 믿음이면 동일한 기적의 역사는 일어난다.
믿음을 적용할 때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보니 자기 의지와 노력을 믿고 행할 때가 많고, 반면 타인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간섭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이렇게 한다면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맡긴다 하더라도 실상은 내가 주도하는 것이어서 믿음 없이 행하는 것이다.
복음은 대단한 적극성을 요구한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하셨고,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나도 걸을 수 있게 해달라’ 도전했을 때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가다가 믿음이 없어 빠지기는 했어도 그 적극적인 믿음이 다른 제자들이 경험하지 못한 물 위를 걷는 엄청난 경험을 그는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은 운명과 다르다. 운명은 딱 정해진 틀 속에서 모든 게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뜻에 대해서 말하면서 마치 운명론이나 결정론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저 그 뜻을 잘 알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달리 행동하겠다고 하는 열려진 주권이다. 마치 나를 따라오듯이, 내 결정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믿어주는 태도를 갖고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부터 자녀로 부르셨고 그분과 어깨를 나란히 할 동역자로 생각하신다. 심히 놀라운 일이다.
아무리 연약하고 형편없어도 나의 믿음을 하나님의 인자와 선하심에 두면, 비록 내가 반복적으로 실수하고 죄를 짓는 경우에도 도리어 그분께 긍휼을 구하며 적극적으로 순종의 길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그분 크기 만한 기적을 행하시는 삶을 경험할 수 있다.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에도 이런 진리가 있다. 그분과 이런 관계 설정이 이뤄지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다 응답해 주시는 삶’, ‘항상 열매가 있어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복음은 나로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만든다. 그런데 그 믿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뿌리가 하나님 안에 견고하게 내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믿음에 대해서 새롭게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