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 남 감리교회의 독실한 가정에서 태어난 루비 켄드릭은 꿈 많은 소녀 시절부터 불신자들에 대한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해외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텍사스 여자고등성경학교에 진학했다. 1905년 6월에 졸업한 그녀는 선교사 파송 연령 제한에 걸리자 교사로 1년, 대학 학부 과정 1년을 수학하면서 해외 선교를 위해 착실히 준비했다. 그녀는 이 기간에 택사스 엡윗 청년회(Epworth League, 1889년 미국에서 창설된 감리교의 청년 단체이다. ‘엡윗’은 요한 웨슬리의 고향 이름에서 따왔다.) 대표가 되었고, 1907년 9월에 남 감리교회 여자 외국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조선으로 달려왔다.
텍사스에서 엡윗 청년회 컨퍼런스가 열리고 있던 중 조선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가득 담긴 그녀의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만일 내게 일천 생명이 있다면 그것을 모두 조선에 주겠노라”라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는 그곳의 수많은 사람의 심령을 감동시켰다. 그런데 엡윗 청년회 컨퍼런스 이튿날에 조선으로부터 갑자기 비보가 날아들었다. 루비 켄드릭이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녀는 1908년 6월 9일에 맹장염 수술을 받고, 열흘 후인 19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선 선교의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만인 내가 죽으면 텍사스 청년들에게 가서 열 명씩, 스무 명씩, 오십 명씩 조선으로 오라고 일러 주십시오.” 그녀의 말은 텍사스 엡윗 청년회 컨퍼런스에 전달되었고 그 자리에 참석한 수많은 젊은이의 가슴에 선교의 불씨를 지폈다. 그들 중 20여 명이 은둔의 나라 조선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텍사스 엡윗청년회는 해마다 헌금을 모아 조선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의 사례비를 지원했다.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교회의 부흥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과 순교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다음은 그녀가 부모님께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아버지, 어머니…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예수님을 영접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 본부에서는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순교를 할 작정인가 봅니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들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에 어른거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 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이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하겠죠?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어 내겠죠? 저는 이곳에 작은 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히게 되었을 때 아마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제가 조선을 향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한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