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배우자와의 관계로 인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성도와 대화를 나눈 후에 주님이 인간관계에 대해서 특별히 주신 마음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이다. 하나님이 제일 중요하다 하신 두 가지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도,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가장 절망적이게 된 것도 알고 보면 관계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도 관계의 화평과 화목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성경의 권면도 단연코 사랑과 용서와 하나 됨이 많다.
우리는 평생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웃고 울면서 살아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성숙해지기 시작할 때면 ‘이제는 네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한 번 새롭게 해 볼까?’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7장에 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두 가지 기도 중에서 첫 번째 거룩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이라면 두 번째 하나 됨은 이웃과의 연합을 위한 기도이다.
어떤 사람이든 관계를 맺고 살아가다보면 어느 순간인가 마음에 들지 않고 싫어지고 미워지는 때가 온다. 꼭 상대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본래 하나님을 떠난 우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런 요소를 다 갖고 있다. 모두와 다 잘 지내는데 유독 특정 사람과 문제가 있다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나의 허물을 더 잘 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갈등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쌍방 간에 마음에 들지 않을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그 사람과 관계를 잘 맺는데 성공하면 내가 훨씬 성숙해지지만 살면서 언제나 있기 마련인 그런 사람이 싫어서 내치면 그만큼 인격 미숙아로 남는 것이다.
상대의 허물과 부족이 나를 힘들게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보통은 마음이 상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 사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힘든 마음을 나눈다. 성경은 이런 행동을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 수군거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런 경향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많다면 비판하는 그 사람보다 더 내 안에 고쳐야 할 부분이 많아서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마태복음 7:3-4).
일반적으로 상대의 허물과 연약함은 내가 그를 싫어하고 미워해야 할 이유와 심각할 경우는 관계를 정리하려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주님은 정반대로 생각하신다. ‘비로소 내가 너를 그 사람에게 붙여진 이유를 발견한 거야. 네가 다른 사람보다 더 그것을 잘 볼 수 있어서 그에게 너를 보낸 거야.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험담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잘 세워주지 않을래?’
결국 상대의 부족과 죄악은 그를 멀리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며 섬겨야 할 동기가 되어야 한다. 부부 사이에서 그런 부분이 보이면 ‘드디어 이 사람과 결혼한 이유를 발견했다’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고, 성도 간에 그런 일이 생기면 ’마침내 그를 섬기고 헌신해야 할 이유를 찾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가까이 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멀리해야 할 이유로 생각하고, 사랑해야 할 부분을 가지고 미워해야 할 근거로 삼는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롬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