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문득 ‘나는 평소에 편하게 만나고 싶어하는 목사님들이 누구지?’라고 생각해보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대단히 훌륭해서 배울 게 많은 분이 아니라 만날 때마다 내가 대단히 훌륭한 목회자라고 칭찬해 주는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해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부모는 맨날 잔소리만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나를 환영해주고 인정해줘서 그럴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인간관계에 대해서 조언할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더 나은 사람과 만나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그런 사람보단 만날 때마다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을 찾고 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창옥 교수가 남자 청년들에게 배우자 될 여자를 고를 때 얼굴이 예쁜 여자보다 말을 곱게 하는 여자를 선택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남성이 싫어하는 여성을 ‘바른 말을 기분 나쁘게 말하는 여성’ 이라고 했다. 엄마나 아내의 바가지(?)가 이런 성격을 띤 경우가 많다. 여성들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말을 많이 하니까 이런 말을 했지만, 이것은 남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사람은 충고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바뀌는 것이다.
대학시절 인간관계와 관련해서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준 책이 ‘격려를 통한 상담’이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으로 자기를 가리는 그 부분을 가지고, 사람은 마음 저변에 수치와 두려움이 있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수많은 껍질로 포장해서 감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학벌, 돈, 유머, 외모 등이 될 수 있다. 껍질과 껍질로 만나는 관계에서는 친밀함을 경험할 수 없고, 그것을 벗고 두려워하는 그 본마음까지 드러내는 관계에서만이 그 친밀함을 경험하는데 그 껍집을 벗기게 해 주는 것이 격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격려하는 사람 역시도 껍질을 벗고 사람을 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격려하려면 그 인간 자체가 존귀하다는 것을 알고, 현재의 모습보다 변화될 장래의 모습을 더 볼 수 있어야 가능하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영광스런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믿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수많은 조항과 이유를 들어서 사람의 잘 잘못을 가려서 비판했지만,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당시에 가장 하찮게 여겼던 세리와 죄인과 창녀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세리와 죄인과 창녀들을 대하셨기에 그들이 부담없이 그분께 다가갈 수 있었을까? 단지 좋은 교훈, 바른 말만 했다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을 존귀한 인간으로 영접하고 지금은 형편 없지만 장래에 자신을 믿어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믿어주고 격려해 주었으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사람을 대하고 있나? 나는 자녀들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우리 성도들에게 격려하는 사람인가? 지금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소중하고 존귀하다고 말로만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렇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나를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 모두가 얼마나 많은 허물과 부족이 있겠는가? 평생 예수님처럼 격려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다짐해 본다.